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파스샹달 전투 (문단 편집) === [[독일 제국군]]의 상황 === 프리드리히 베르트람 식스트 폰아르민[* [[독일 국방군]] 소속 [[중장]] 한스하인리히 식스트 폰아르민(Hans-Heinrich Sixt von Armin)의 아버지. 여담으로 이 사람은 [[독소전쟁]] 중 [[스탈린그라드 전투]]에서 제113보병사단장이었고 [[프리드리히 파울루스]]와 같이 항복하였다.]이 이끄는 독일 제4군은 소규모 병력이 지키는 전방 방어 지대 후방에 구축된 [[콘크리트]] [[토치카]]와 요새화된 [[농장]]들을 중심으로 단단한 방어선을 형성하고 있었다. 토치카들은 지상에 건설되어 있었고, 교차 사격으로 서로를 지원할 수 있는 위치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, 8인치 [[곡사포]] 이하의 포를 가지곤 도저히 파괴할 수 없을 만큼 두꺼웠다. 3년 간의 전쟁으로 완전히 늪지대가 되어버린 이프르 지역에서 독일군은 참호를 더 깊게 파고 철조망을 확장시켰으며 때로는 무너진 건물에 토치카와 벙커를 설치하여 작업조에게 엄폐물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시설에 완벽한 위장을 제공했다. 그러나 [[60고지 전투|메시인에서 영국군이 거대 지뢰를 이용해 독일군에 큰 피해를 입히자]], 독일군은 연합군의 공세에 두려움을 가져 플랑드르 선으로 전선을 후퇴시킬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. 이때 6월 13일 특급 방어 전술가로 알려진 폰로스베르크 [[대령]]이 [[참모장]]으로 부임하게 되었고, 재정비를 통해 플랑드르 진지는 서부전선에서 지리적으로, 군사적으로 가장 강력한 진지로 변모하게 되었다. 완성된 플랑드르 진지는 9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. 전방에는 방어군 사단의 1선 [[대대]]들이 3겹의 [[참호]]선에 은신해 있었고 그 앞으로 포탄이 떨어져 생긴 구덩이에 청음초[* 적의 움직임을 눈으로 볼 수 없는 흐린 날씨나 밤에 소리를 들어 적의 행동을 탐지하려고 전방에 둔 [[초소]].]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었다. 그다음 전투 지대는 [[기관총]] 초소들이 차지했는데, 1열의 토치카 선이 지원했고, 마지막 후방 전투 지대에는 지원 포대 진지 사이에 산재한 콘크리트 벙커에 반격을 맡을 사단들이 숨어 있었다. 독일군은 진지를 방어하는 데 2개의 별개 대형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했으며 이에 따라 사단들을 재조직했다. 최초 공격을 견뎌내야 했던 참호 주둔군은 숫자가 줄어 몇 개 [[중대(군대)|중대]]와 대대로만 구성되었다. 그 뒤 후방 전투 지대에는 반격 임무를 맡은 사단들이 배치되었고 그 임무는 1선 부대들의 고정 방어와 국지적 역공에 의해 적군 공격이 중단되면 전진하는 것이었다. 플랑드르 진지 방어군은 1917년 7월에 10개 사단으로 이루어졌다. 제3근위사단과 제11사단[* 독일의 소설가 [[에른스트 윙어]]가 이 시기 11사단 예하 제73 하노버 수발총병연대에서 복무했다.] 같은 강하고 훈련이 잘된 정예 부대로 구성되어 있었으며, 11km를 조금 넘는 전선에 1556문의 [[야포]]와 중포가 배치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